조선인이 북부지방출신이 많은데 비해 재일조선인의 출신 지역은 남부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이주 목적도 정치적인 목적이 아닌 노동이나 학업이다. 물론 정치적인 목적의 소유자도 있기는 하지만 그 비중은 매우 미미하다. 초기에는 순수하게 학업만을 목적으로 도일하는 유학생의 비중이 높았으나
재일한인(재일유학생,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의 생활상태
재일조선인은 거의 대부분이 도일이전에 농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근대적인 산업노동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일본에서 하층노동력으로서 육체노동에 종사했다. 즉 일본인이 기피하는 부문에 종사한 것이다. 직종을 크게 나누어보면, 토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이후에는 일제의 징병(徵兵)과 징용정책(徵用政策)에 의해 다수의 한국인이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당시 재일한국인의 증가 추세를 보면 1911년 2,527명이었던 것이 1920년에는 3만 189명, 1930년에는 29만 8061명, 1938년에는 79만 9878명으로(일본 내무성 조사) 급속히 증가하였다.
한인탄광노동자들이 일하기 시작하여 1932년 7월 아소상점이 경영하는 6개 탄갱(山內, 上三緖, 吉외, 綱分,赤坂, 豆田)에는 총 5,160명의 갱부가 고용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24%인 1,070명이 한인갱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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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일제시대(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노동운동사
식민지 시대
조선인을 회유하고 ‘황국신민화’의 학문적 기초를 마련하는 동시에, 종전의 조선을 정체된 사회로, 일제하의 조선을 발전하는 사회로 검증해 내고자 하였다. 이렇게 노골화되는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의 공세는 군국주의체제로의 강화와 더불어 민족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 이었다.
위하여 조선총독부는 1940년 1월 새로이 ‘조선직업소개령’을 공포하였다. 또한 여자들을 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 징발했으며 37만 9천 44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끌려갔다. 징용과 징병으로 동원된 사람들은 64만 8백 40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중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약 20만 명으로 계산된다.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개항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항직후에는 정치가나 망명자, 유학생들이 재일조선인의 대종을 이루고 있었으나 1880년대부터 노동자의 유입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880년대에 주로 큐우슈우(九州)지방의 탄광회사가 중심이 된 조선인 노동자 모집을 통해 도일을 한 조
단체의 노력으로 적지 않은 진전이 있었지만, 지문날인(指紋捺印) 제도와 공무원 채용 시 국적조항(國籍條項) 등 아직도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에 관한 문제는 한일간의 현안으로 남아 있다. 생활방식으로나 의식적으로 조국과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사회로부터도 소외된 교포 2세, 3세의 문제
ㄷ. 의생활
조선인 여성노무자들이 가장 많이 간 후지코시 공장과 마쓰비시 공장, 누마즈 방직공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후지코시 공장에서는 작업복과 모자를 쓰고 회사 수첩을 윗옷 주머니에 넣은 채로 일을 했다. 미쓰비시회사로 동원된 전남출신 여성노무자들은 도덕 공장에서 작업복과
재일동포 문제를 역사적 맥락과 현재적 맥락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재일동포에 대한 정의
재일동포는 자신의 조국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표현하는 용어 또한 다양하다.
재일한국인․조선인: 한국 국적자와 조선 국적자를 함께 지